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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


남서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오스트레일리아의 남동쪽으로 폭이 약 2000㎞인 태즈먼해를 사이에 두고 있다.



설명


남서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오스트레일리아의 남동쪽으로 폭이 약 2000㎞인 태즈먼해를 사이에 두고 있다. 주로 북섬(北島;11만 4690㎢)과 남섬(南島;15만 460㎢)의 2개 섬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밖에 스튜어트섬·채텀제도를 거느리고 있다. 면적 26만 8680㎢. 인구 395만 1000명(2003). 대체로 남위 33~53˚, 동경 162~173˚ 안에 있다. 관할 도서로 토켈라우제도·쿡제도(1965년 자치정부 발족)·니우에섬(1974년 자치정부 발족)이 있다.

1907년 영국의 자치령이 되고 1947년에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영연방(코먼웰스)가맹국이며 공용어는 영어이다. 수도는 웰링턴. 국명은 1642년 네덜란드 탐험가 A.J. 타스만이 Staten Landt(남국이라는 뜻)로 명명했으나, 뒤에 네덜란드의 한 지명을 따서 Nieuw Zeeland(새로운 젤란트라는 뜻)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또한 마오리족(族)은 아오테아로아(Aotearoa;희고 긴 구름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이 나라는 폴리네시아문화권에 속하지만 19세기 중엽 이래 영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을 받아들인 결과 백인의 비율이 90%를 차지하여 그밖의 폴리네시아도서와는 다른 발전을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남반구에 있어서 백인주도(白人主導)의 나라로서 생활수준이 높은 완전복지국가가 되어 있다.

국기는 영연방가맹국임을 나타내는 유니언잭에다 남십자성을 나타내는 4개의 별을 배치한 것이다. 뉴질랜드국가(國歌)는 <God Save the queen>과 <God Defend New Zealand>의 2종류가 있다.

뉴질랜드의 자연

뉴질랜드의 지형·지질
국토는 환태평양조산대에 속하며 주섬인 북섬과 남섬이 남북으로 놓여져 (감마) 형태를 하고 있다. 지형은 산이 많고 화산도 많으며 척량산맥은 특히 높고 험준하다. 해발고도 200m 미만의 저지는 전체 섬 면적의 1/6에 지나지 않으며 평지가 적다.

개척이 진행된 200~300m의 구릉지 및 산록부가 2/3를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는 1000m 이상의 고지 또는 산지이다. 남북 양섬의 척량산맥은 제3기(紀)에서 제4기의 홍적세에 걸친 카이코우라조산운동으로 오늘날의 윤곽이 완성되었다.

북섬에는 척량산맥이 동부로 뻗어 있고 중앙부는 타우포화산대라고 하는 용결응회암(溶結凝灰岩)의 화산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루아페후 화산(2797m)·응가우러호이 화산(2291m), 통가리로 화산(1969m)의 3개 활화산이 솟아 있고, 온천관광지를 이루고 있다. 서쪽 끝에는 원뿔꼴의 에그몬트산(2515m)이 솟아 있다.

남섬에는 서쪽 연안에 가깝게 서던알프스가 북북동-남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고, 최고봉 쿡산(3764m)을 비롯하여 3000m급의 높은 산이 이어진다. 태즈먼과 폭스 등의 빙하, 와카티푸호 등의 수많은 빙하호를 비롯한 빙하지형이 있으며, 남서안에는 대규모 피오르드(협만)가 발달한다. 산맥 동부에는 이 나라 최대의 캔터베리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남부에는 오타고 고지가 이어져 있다.

뉴질랜드의 기후
편서풍대에 위치하므로 북단부(北端部)의 아열대지역과 고산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섬 전체가 서안해양성의 온화한 기후의 지배를 받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북섬의 오클랜드가 15.1℃, 남섬의 남단 인버카길이 9.8℃이며, 연교차도 대략 8~9℃로 한서(寒暑)의 차는 크지 않다.

연강수랑을 보면 대부분의 지역은 1000~1500㎜이나, 서던알프스의 서사면(西斜面)은 2000~6000㎜에 달한다. 이 때문에 광범한 지역에 걸쳐 빙하가 형성되었으며, 특히 서사면의 빙하는 밀생하는 온대우림 사이를 지나 해발고도 200m까지 하강하고 있다. 반대로 동쪽은 500㎜ 미만의 지역도 있으며 때때로 푄현상도 보여 타소크(벼과식물)의 초원이 되어 있다.

뉴질랜드의 지지(地誌)

북섬
자연환경과 행정구분을 가미하여 몇 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으나 여기서는 ① 노스랜드 ② 오클랜드 ③ 와이카토지방 ④ 중앙부(화산대지) ⑤ 타라나키지방 ⑥ 마나와투저지 ⑦ 웰링턴 ⑧ 이스트랜드 등 8지역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① 북부의 노스랜드는 전부터 범선의 마스트 재(材)로 사용하는 카우리송(松)의 벌채로 일찍부터 개척되었으며 독립 이전의 중심지였다. 최초의 수도 러셀(오클랜드 북서 약 184㎞)이 이곳에 있다. 오늘날 황거레이는 석유정제기지로 알려져 있다.

② 오클랜드는 이 나라 최대의 상공업도시이며 모든 공업이 집중되어 있어 전국 공업생산액의 대략 1/4을 차지한다. 외항 와이테마타는 양모와 유제품(乳製品)의 수출항이다. 오클랜드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③ 해밀턴을 중심으로 한 와이카토지방은 집약적 낙농과 면양의 사육이 활발하다.

④ 중앙부는 통가리로국립공원이 있는 화산지대이며, 로터루아·타우포 등 관광·휴양지가 있다.

⑤ 서단부(西端部)의 타라나키지방에는 에그몬트산록에 예부터 낙농지대가 있다. 그리고 이 나라 최대의 천연가스전(田)인 카푸니가 있다. 타라나키지방의 중심도시는 뉴플리머스이다.

⑥ 또한 낙농지대는 남서의 마나와루 저지에 펼쳐져 있으며 왕거누이·파머스턴노스의 두 도시가 그 중심이다.

⑦ 남부에는 수도 웰링턴이 있다. 배후의 구릉지 때문에 수도는 북쪽의 헛밸리에 걸쳐 발전하고 있다.

⑧ 동부의 이스트랜드는 목양지대(牧羊地帶)이나 네이피어에서 헤이스팅스에 걸친 호크만안(灣岸)은 원예농업지대로 되어 있다.

남섬
서던알프스에서 남서부의 피오르드랜드에 걸쳐서는 무거주지(無居住地)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① 웨스트랜드 ② 태즈먼만안(灣岸) ③ 알프스동록(東麓) ④ 캔터베리평야 ⑤ 오타고지방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산맥의 서쪽 웨스트랜드에는 탄전과 석탄을 실어내는 항구가 흩어져 있다.

② 북부의 태즈먼만안은 과수원지대이며 출하항 넬슨이 있다.

③ 알프스동쪽 기슭의 빙식호지대는 관광지이며, 허미티지·퀸즈타운 등의 관광도시가 있다. 그리고 대규모의 방목지가 전개되어 있다.

④ 그 동쪽으로 이어지는 캔터베리평야는 소맥과 면양의 혼합농업지역이며, 캔터베리램이 사육되고 있다. 중심도시는 크라이스트처치이다.

⑤ 남부는 오타고지방이며 북쪽 절반은 혼합농업, 남쪽 절반은 낙농지역으로 되어 있으며 중심도시는 더니든, 인버카길이다.

뉴질랜드의 역사

탐험과 식민
뉴질랜드에 최초로 건너온 사람은 모아헌터(모아를 사냥하는 사람)라고 불리는 폴리네시아계의 인종으로 8세기경 타히티방면에서 남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13~14세기에 마오리족의 대규모 이주가 있었고, 주로 따뜻한 북섬에서 살았다.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이곳에 온 사람은 타스만이었고, 그 뒤 영국사람 쿡이 1769년 이래 수차 탐험을 하였다. 당초에는 포경(捕鯨)·바다표범을 잡는 기지로 이용되었으며, 1814년 영국인 선교사 S. 마스덴이 전도소를 세우고 마오리어(語)로 교화하였다.

1839년 6월 15일에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뉴 사우스 웨일스령에 편입되고 영국 해군 W. 홉슨이 총독대리로 취임하였다. 다음해 1840년 2월 6일, 마오리족의 추장과의 사이에 와이탕기조약이 체결되고 통수권은 영국왕에게 이양되었다. 그 뒤 뉴사우스웨일스로부터 분리되어 영국 본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다. 이는 당시 남태평양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프랑스 세력을 저지하는 의미도 있었다.

식민지의 발전
본격적인 이민은 1840년 뉴질랜드회사의 식민지가 포트 니콜슨 서안(웰링턴)에 건설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오타고협회·캔터베리협회 등에 의하여 이민이 보내어졌다. 당초의 개발방식은 뉴질랜드회사의 경영자 E.G. 웨이크필드에 의한 것인데 영국식 사회경제제도를 유지하면서 자급적 농업경영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가구당 16㏊의 경영규모로는 너무 적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자급적 농업경영 대신 대규모의 목양지(牧羊地)가 오지로 뻗어나갔다.

북섬에서는 토지소유와 그리스도교 포교를 둘러싸고 이주자와 마오리족 사이에 2차에 걸친 전쟁이 일어났다. 한편 남섬에서는 1861년 오타고 중부에서, 1865년에는 웨스트랜드에서 잇따라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를 초래하였고 그 결과 남섬이 번영하였다.

독립국으로서의 발자취
1907년에 자치령이 되어, 실질적인 독립을 얻었으나, 영국 본토와는 두터운 유대로 이어져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 유럽에 파병하였으나 자국(自國)은 주전장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발전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의 세계적인 불황은 뉴질랜드에도 타격을 주었다. 1935년 불안정한 보수정권은 노동당에게 패하고 그동안 사회입법이 착실히 정비되어 복지국가로서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이 연합군에 가담하여 미군의 보급기지로서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에 따라 전후에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또 영국의 상대적인 국력 쇠퇴에 따라 아시아·태평양 여러 나라와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1947년에는 영연방을 구성하는 자치령과 영국 본국이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을 확인한 웨스트민스터헌장의 채택으로 정식으로 독립국가가 되었다.

뉴질랜드의 정치

국내정치
정체는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을 원수로 하는 입헌군주국이며 임기 5년의 총독이 여왕의 대리인으로 임명되어 있다. 헌법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다. 의회는 1951년까지는 영국을 본으로 한 이원제였으나 현재는 단원제이다. 1879년 이래 3년마다 총선거가 실시되고 있으며 1984년 95명의 의원 중 4명은 마오리족을 위해 확보되었다. 여성참정권은 1893년에 주어졌고, 피선거권은 1919년에 확립됐다. 오늘날 선거권은 18세 이상 남녀에게 주어져 있다.

1993년 11월 새 선거제를 국민투표로 확정, 직선의원 60명, 나머지 마오리족 5명, 비례대표 55명으로 모두 120명 의원으로 개편하였다.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로 실권은 내각이 총리에게 있다. 노동당과 국민당의 양당제가 확립돼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노동당은 1984년 7월과 1987년 8월 총선에서 승리, 집권하였다가 1990년 10월과 1993년 11월 총선에서 국민당에게 패배,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1996년 총선에서는 국민당이 뉴질랜드제일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집권에 성공하였으나, 1999년 11월 총선결과 헬렌 클라크 노동당 당수가 이끄는 좌파연합이 승리해 9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었으며, 2002년 총선에서도 헬렌 클라크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이 승리,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외교
영연방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연방제국, 특히 같은 연방가맹국인 이웃나라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관계가 깊다. 국토의 지리적 위치가 남태평양이라는 점에서 안전보장을 위해 강대한 방위력을 가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3국이 1952년에 군사동맹 앤저스(ANZUS)조약을 체결하였다. 또 아시아태평양협의회(ASPAC)에도 가입하여 태평양을 둘러싼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1950년 콜롬보계획의 창설과 함께 가맹하여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개발원조에 힘썼고, 1963년에는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에, 1966년에는 아시아개발은행에 가입하여 아시아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영국이 유럽연합(EU)에 가맹한 오늘날, 농축산물시장을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북아프리카 및 서아시아에도 접근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이며, 오스트레일리아와의 통화, 상법, 세제상의 장벽을 완전폐지해 2000년 초까지 양국경제의 완전통합을 추구하고 있다. 2000년 2월 싱가포르와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합의하였다.

국방
규모는 크지 않지만 육·해·공군 3군이 있으며 최고사령관은 총독이다. 병력은 육군 4400명, 해군 1980명, 공군 2800명(2002)이고 국방비는 6억 9700만 달러(2002)이다. 1950년 이래 징병제가 시행되었으나 1962년부터는 선발식 의무교련제로 바뀌었고, 1970년 이래 지원제이다.

뉴질랜드의 경제

개관
뉴질랜드 경제의 특색은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아 국민 1인당 무역액도 세계의 상위권에 들고 있다. 수출의 70%가 농축산물을 중심으로 한 제1차산품이며 수입의 약 50%가 중화학공업제품이라는 데서 농업국형 또는 개발도상국형 무역구조이다.

산업별노동인구도 제1차산업이 8%로서 다른 선진 여러 나라에 비하여 높으며, 제3차산업도 64%의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생활수준이 높은 복지국가로도 알려져 개발도상국형과 선진국형의 2가지 면을 갖고 있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많은 것도 특색의 하나이며, 금융·운수·통신·동력·자원·관광 등 국영사업의 비율이 높다.

자원
석탄·사철(砂鐵)·수력·목재를 제외하고는 자원이 부족하다. 석탄의 확인 매장량은 2억 1000만 t, 연간생산량은 약 327만 t이며 거의 국내수요를 충당하고 있다. 남섬의 북서부에는 불러·리프턴·그레이머스 등 주요 탄광이 집중되어 있으며 북섬의 티탄·마그네사이트 사철광상(鑛床)이 수출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풍부한 강수량과 산지·호소(湖沼)로 수력발전이 성하며, 이것으로 전력의 3/4을 충당하고 있다. 총발전량 390억 ㎾h(2000). 삼림은 국토의 1/4이며 개발가능한 것은 10% 정도이다. 최근에는 식목효과가 나타나 라디아타송(松) 등이 수출되고 있다.

농·목축업
농지면적은 2122만 ㏊에 이르고 있으나 이른바 경작지는 49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뉴질랜드 농업은 <초지농업(草地農業)>이라고 하여 목초에의 의존도가 높고, 목축·낙농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면양 4314만 마리, 소 963만 마리, 돼지 35만 마리(2002)를 보유하며, 평균경영규모는 면양의 방목이 460㏊, 면양·소맥의 혼합농업이 약 190㏊, 낙농은 약 60㏊이다.

농업종사자 1인당 경작지는 97㏊(2000)이며, 농업의 노동생산성은 세계적 수준이다.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비율은 10%에도 못미치나 농업은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 나라 경제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공업
제2차산업 노동자의 비율은 21%이며, 농업의 약 3배를 차지하고 있으나, 국내총생산 중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7%로 다른 산업부문에 비하여 생산성은 높지 않다. 이는 식육가공·낙농품 등의 중소공장이 8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알루미늄 정련, 선강일관 공장 등 중공업부문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알루미늄은 수출산업으로 확립되어 있다. 공장의 70%가 북섬, 특히 오클랜드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무역
수출 142억 달러, 수입 150억 달러(2002)로 2001년 세계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주 수출품목인 낙농품, 육류 등의 수출가격 상승과 자국화 저평가에 따른 국제경쟁력의 강화 등으로 경제 호조 현상을 보이고 있다. 수출의 대부분이 식육·낙농품·양모가 차지하고 있으나 1976년 이후 알루미늄이 추가되었다.

수입품은 석유 외에 기계·수송기계(자동차) 등의 공업제품이다. 주요 무역대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일본·미국·영국이다.

교통
섬나라이므로 항공·해상교통이 중요하고 오클랜드·웰링턴·크라이스트처치에는 국제공항이 있고, 항만도시로서도 그 지위가 높다. 국내교통은 근거리에서는 도로교통이 주종을 이루며, 자동차는 2명에 1대꼴로 보급되어 있다.

장거리 여객수송에는 항공기가 이용되며, 항공망도 완비되어 있다. 철도연장은 4273㎞로 화물수송이 주류를 이루나, 오클랜드-웰링턴 사이는 특급·침대열차편이 있다.

관광
관광사업은 주요산업의 하나로서 성장중에 있으며, 2000년에는 20억 6800만 달러로 주요한 외화획득원이 되어 있다. 통가리로국립공원을 비롯하여 에그몬트산·쿡산·피오르드랜드 등 9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2003년 《반지의 제왕》의 촬영지라는 점에 힘입어 뉴질랜드를 찾은 관광객수가 최고기록을 갱신했다.

뉴질랜드의 사회·문화

주민·인구
원주민인 마오리족은 1840년 당시 인구가 10만여 명을 헤아렸으나 1886년에는 4만 3927명으로 격감하였다. 그러나 1896년 이래 증가일로에 있으며 오늘날에는 약 50만명을 헤아려 총인구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90% 이상이 북섬에 거주하며 마오리어와 고유문화·전통·관습을 지켜 내려오고 있다. 백인과의 인종차별은 거의 없으며, 정부는 1896년 10월 영국식민지시절 때 토지를 빼앗긴 선주민 마오리 니타프족에게 부정토지취득을 정식으로 사죄·보상하였다.

마오리족 이외의 유색인종은 총인구의 약 10% 정도이며 총인구의 90% 가까이가 백인이다. 그리고 인구의 74%가 북섬에, 26%가 남섬에 거주하고 있다. 국내총생산은 581억 달러, 1인당 1만 3700달러(2002)이며,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인구의 도시집중이 현저하여 오클랜드·웰링턴·크라이스트처치·더니든 등 4대 도시권에서 총인구의 약 51%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복지
가장 진보된 복지 국가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국민의 평등정신의 발현의 결과이다. 노령연금법은 1898년에, 사회보장법은 1938년에 성립되었으며, 1945년에는 최저임금제가 확립되어 이것이 사회복지정책추진의 기반이 되었다.

의료를 포함하여 사회보장비는 국가예산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1991년 4월부터 복지정책을 수정하여 가족수당폐지, 실업수당감액, 의료비인상 등을 실시하였다.

교육
교육은 6∼15세까지가 의무교육, 19세까지는 교육비 무료이며, 신체장애자와 벽지의 어린이들에게는 통신교육제도가 있다. 대학은 모두 국립이다.

스포츠·문화
옥외 스포츠가 활발하고 육상경기에서는 세계적인 중·장거리 선수를 배출하였다. 스키는 북반구가 여름일 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가 있다.

뉴질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문학가로는 1923년에 프랑스에서 객사한, 《원유회(園遊會)》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K. 맨스필드가 있다. 마오리문화는 목각이 뛰어나며, 건물입구·기둥·벽·천장 등을 추상적인 조각으로 장식하고 있다. 로터루아에는 이들의 전통예술을 보존하기 위한 회관이 있다.

하와이주

하와이 제도의 발견
하와이는 옛날부터 태평양의 섬들 가운데서 폴리네시아의 독특한 민족색이 특히 강한 곳이었다. 지금은 개발이 진행되어 근대화되어 가고 있는 하와이지만, 사람들의 생활 배경에는 지금도 하와이만의 독특한 문화가 남아 있다. 1778년,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최초로 발견하여 샌드위치 섬이라고 이름 붙인 하와이 제도. 그후 약 100년에 걸친 왕조시대를 지나, 미합중국의 50번째 주가 되기까지의 하와이 역사를 더듬어 본다.

최초의 하와이인
동남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점차 남쪽과 동쪽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이들은 솔로몬과 피지, 그리고 마침내는 뉴질랜드를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이스터 섬, 북쪽으로는 하와이 제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3각형의 폴리네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이 문화권 안에는 사모아, 통가, 타히티, 마르케사스 등의 제도들이 포함되며, 이들 섬들은 오래 전부터 서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와이 비숍 박물관의 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하와이 제도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마르케사스 섬(타히티의 북동 지역)에서 쌍둥이 카누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서기 750년경에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후 서기 1000년경에는 타히티와 소시에테 제도의 다른 부족들이 하와이로 이주해 와 인구가 늘어났다. 이들은 이미 살고 있던 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대 하와이 사회를 형성하였다.

쿡 선장의 하와이 제도 발견
이러한 하와이 제도의 잠을 깨운 것이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다. 쿡 선장은 그가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북서항로를 찾기 위해 소시에테 섬의 북쪽에서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리졸루션(Resolution), 디스커버리(Discovery)라는 두 척의 영국배를 가지고 항해를 시작했다.
1778년 1월 18일, 그는 멀리서 오아후 섬을 발견했으나, 역풍이 부는 바람에 배가 서쪽으로 밀려가, 이틀 후인 1월 20일에 카우아이(Kauai) 섬의 와이메아(Waimea) 부근에 상륙하였다.
영국 해군의 샌드위치 공작 밑에서 복무했던 쿡 선장은 공작을 기리기 위해 그가 발견한 섬들에 대해 샌드위치 섬이라고 이름을 붙여 세계에 소개했다. 샌드위치라는 말은 공작이 샌드위치를 즐겨 먹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1850년대까지 하와이 제도는 샌드위치 섬이라고 불렸다.
선원들은 섬의 원주민들과 무역을 하기 시작하여 멜론, 호박, 양파와 같은 야채들이 섬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임질과 매독 같은 무서운 전염병도 함께 전해져 하와이인들을 파괴시켜 갔다. 역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쿡 선장이 발견할 당시 하와이 제도는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는데, 80년 후에는 6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쿡 선장의 죽음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고 있는 북서 항로를 찾아 항해를 계속하던 쿡 선장은 1778년 11월에 다시 샌드위치 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달 동안 여러 섬들을 순항하다가 1779년 1월 16일에 하와이(Hawaii) 섬의 케알라케쿠아(Kealakekua) 만에 배를 정박시켰다. 그는 이곳에서 배를 수선하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은 후, 2월 4일에 북쪽으로 떠났다. 그가 떠나자, 그 동안 많은 식량을 빼앗겼고 두려움을 느꼈던 섬 원주민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3일 후, 쿡 선장의 배는 큰 폭풍우를 만나 앞돛대가 망가진 채 수리를 위해 다시 하와이 섬으로 되돌아왔다. 섬 주민들은 쿡 선장 일행을 더 이상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고, 선원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디스커버리(Discovery) 호의 가장 큰 보트가 없어져 버린 어느 날 밤, 쿡 선장은 부하 선원들과 함께 마을의 추장을 붙잡아 사라진 보트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마을의 원주민들은 힘을 합쳐 추장을 구출해 내고, 그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러던 중에 다른 부족의 추장이 영국군의 대포 공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모여든 군중의 공격성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쿡 선장은 급히 철수를 지시하였으나, 충돌을 피하지 못하고 원주민의 단검에 찔려 죽었다. 그러한 혼란의 와중에 그의 배도 불타 버렸다.
하와이 섬의 원주민들은 싸움에서 숨진 많은 부족민들의 시신을 거두고 부상자들을 돌보았으며, 쿡 선장과 부하 네 명의 시신도 거두었다. 클라크 선장이 쿡 선장의 시신 일부를 케알라케쿠아의 만에 붙였으며, 나머지 부분은 싸움에 참가했던 다른 부족의 추장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른 영국의 선박들은 2월 22일, 케알라케쿠아 만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100년의 하와이 왕조
-카메하메하 대왕의 하와이 통일
카메하메하(하와이어로 외로운 사람이라는 뜻, 재위 1795~1819년) 왕은 하와이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때에 있었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 그의 출생은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하늘이 크게 갈라지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멎자, 서쪽 하늘에서 꼬리를 길게 단 유성이 떨어졌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파에아라고 이름 붙여진 이 남자아이는 쑥쑥 자라 건강하고 힘도 세며, 무예에도 조예가 깊은 청년이 되었다고 한다.
쿡 선장이 발견할 당시, 하와이 제도는 각지에 사는 부족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컸던 것은 하와이 섬의 왕 칼라니오푸우(Kalaniopuu)였다.
카메하메하는 이 왕의 조카로, 어린 시절부터 그의 궁전에서 자랐다. 젊은 날의 카메하메하는 1778년과 1779년에 왕과 함께 쿡 선장의 배를 견학하였다. 카메하메하는 거기에서 서양 문명을 접하고, 현대적인 총포의 위력 앞에서 과학적인 지식을 배웠다. 1782년 칼라니오푸우 왕이 죽자, 카메하메하는 하와이 섬의 경쟁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1790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으로 카메하메하는 케오우아(Keoua) 족을 제외한 전 부족을 통일하였다.
1790년, 그는 현대적인 무기와 두 명의 전 영국 선원의 도움으로 마우이와 몰로카이 섬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오아후 섬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 케오우아 족의 침략 소식을 듣고 다시 하와이 섬으로 돌아왔다.
신의 도움이 필요했던 카메하메하는 전쟁의 신을 위해 카와이하에(Kawaihae)에 거대한 돌사원을 세웠다. 그후 마우이와 카우아이의 추장들이 큰 배를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카메하메하는 이들을 물리쳤다. 카메하메하가 이보다 더 큰 신의 도움을 받은 사건은, 불의 여신 펠레가 킬라우에아 화산을 폭발시켜 케오우아의 세번째 부대를 전멸시킨 것이다. 이후 케오우아는 카메하메하로부터 카와이하에 대사원의 봉헌식에 초청을 받아 왔다가 한 추장에게 살해되었다.
1794년 카메하메하는 마우이와 몰로카이를 탈환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오아후를 정복하였다. 이리하여 카우아이를 제외한 하와이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
1795년, 그는 마우이 섬의 라하이나를 수도로 정하고, 스스로를 카메하메하 대왕이라고 칭하며 왕국을 수립하였다. 1810년에는 그 세력이 대단해져, 카우아이의 추장, 카우무알리가 싸우지 않고도 충성을 맹세해 왔다.
이렇게 해서 하와이 제도 전체를 제패한 카메하메하는 외국과의 교역을 시작으로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서구 문명의 영향 속에서도 그는 조상들이 섬겨 왔던 하와이 신을 숭배하고 풍습을 중요시하여, 섬 원주민들을 당혹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현명하게 식민지를 통솔하였다. 그리하여 1819년 5월 8일, 그가 죽을 때까지 하와이는 그의 탁월한 통치력 덕분으로 태평양의 많은 섬들 중 유일하게 독립된, 평화로운 왕국으로 남아 있었다.

-카메하메하 2세와 선교사의 영향
위대한 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남인 리홀리호(Liholiho, 카메하메하 2세, 재위 1819~1824년)가 왕위에 올랐다. 카메하메하의 총애를 받았던 왕비 카아후마누(Kaahumanu)는 그의 후견인이 되어, 스스로를 섭정여왕이라 칭하며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하와이 역사에 그녀가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1820년 미국의 보스턴으로부터 선교사단이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하고, 영어로 교육을 시킴으로써 사람들은 영어를 학습 문자로 갖게 되었다.
기독교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있었던 카아후마누는 전통적인 관습이나 카푸(Kapu)라고 불리던 인습적인 계급제도를 비판하며, 마침내 카메하메하 2세로 하여금 이 제도를 폐지하게 하였다. 선교사들은 이 계기를 놓치지 않고 기독교 종교개혁운동을 펼쳤고, 일부 과격파에 의해서 성전과 많은 우상물들이 파괴되었다. 이로써 하와이 문화는 종교와 섞이게 되었고, 이것은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쳐 혼란을 가져왔다.
외래인들로 인하여 서구 사상이 하와이에 들어오기 전까지 카푸 제도는 하와이 원주민들 사이에서 100년 이상이나 전해져 오던 것이었다. 그것은 이 제도가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또한 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1824년 카메하메하 2세와 그의 부인 카마말루(Kamamalu)는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했는데, 홍역에 걸려 그해 7월에 죽었다. 그들의 시신은 바이런 경이 진두지휘한 영국 군함에 실려 하와이로 되돌아왔다.

-카메하메하 3세
1824년, 카메하메하 2세의 뒤를 이어 나이가 10살이나 어린 동생 카우이케아오울리(Kauikeaouli)가 9살의 나이로 카메하메하 3세(재위 1824~1854년)가 되었다.
카메하메하 3세가 통치하던 30년간은 하와이 왕조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시대였다. 그는 1840년에 헌법을 공포함으로써 하와이가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의 기강을 확립해 나갈 수 있게 했으며, 토지제도개혁(1842년) 등 국가 체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였다.
1850년에 그는 수도를 마우이의 라하이나에서 오아후의 호놀룰루로 옮겼다. 경제의 중심은 백단향 채취와 고래잡이에서 온난한 기후를 이용한 사탕수수의 재배로 옮겨갔다.

-카메하메하 4세
1854년에 카메하메하 3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조카 알렉산더 리홀리호(Alexander Liholiho, 카메하메하 3세의 이복 누이인 Kinau의 아들이자, 카메하메하 1세의 손자, 재위 1855~1863년)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카메하메하 4세는 산업을 주도하면서 하와이에 경제적인 붐을 가져왔다. 하와이 섬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고, 라하이나와 호놀룰루는 무역을 위한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카메하메하 4세는 미국 방문 때 받은 인종적인 모욕에 대한 분노와 갈수록 깊숙이 파고드는 미국의 강력한 힘에 두려움을 느낀 반면, 영국을 방문했을 때 받은 좋은 인상으로, 하와이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점점 키워 주었다. 그가 남긴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퀸스 병원의 설립이다. 세균에 대한 면역이 없는 하와이인들이 외국인과의 접촉으로 여러 가지 병원균에 전염되어 사망률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왕실은 항상 염려해 왔던 것이다.
1863년 카메하메하 4세는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후계자로 그의 맏형 로트(Lot)를 지명하였다.

-카메하메하 5세와 왕조의 종말
로트(Lot Kamehameha, 카메하메하 5세, 재위 1863~1872년)는 그의 할아버지 카메하메하 1세 때의 찬란했던 왕권을 다시 복원하는 데 힘썼다. 동시에 주민들에게 세심한 정책을 펼쳤던 그는 주법(酒法)의 폐기를 반대하고, 주민들과 자유롭게 어울렸다. 또한 사탕수수 산업의 증진을 위해 노동을 권장하기 시작했고, 이민 부서를 설치하여 외국으로부터 많은 노동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새로운 헌법에 대한 정부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1864년에 헌법을 작성하여 시행에 들어갔다. 이 헌법은 하와이 역사상 어느 헌법보다도 가장 긴, 23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속되기는 했지만, 결국은 왕정을 무너뜨리게 된 반대파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혼을 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던 카메하메하 5세는 그의 누이인 빅토리아 카마말루(Victoria Kamamalu)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그녀는 1866년에 세상을 떠나 버렸다. 다시 파우아히 비숍(카메하메하 1세의 증손녀)에게 왕관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그녀는 사양하였다.
결국 카메하메하 5세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카메하메하 직계의 대는 이어지지 못했으며, 이는 곧 그 왕조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선거로 뽑은 왕, 루날릴로
새로운 왕조가 왕과 귀족에 의해 선출되었다. 카메하메하 1세의 이복 동생의 후손인 윌리엄 찰스 루날릴로(William Charles Lunalilo, 재위 1873~1874년)는 왕실 의회의 선거에 의해 6대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경쟁자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를 투표에서 가볍게 누르고 당선되어, 의회의 승인을 받아 왕이 된 것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 왕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지방 하와이안 세력들과의 싸움이 표면화되고, 반면 왕조정치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경제면에서는 사탕수수 재배가 발달하여 중요한 산업으로 성장을 계속하였다. 파우아히 공주의 부군인 찰스 비숍을 포함하여 세 명의 미국인을 내각에 기용하고 있던 왕의 정부는 사탕수수의 이익을 늘리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하여 미국과 상호조약을 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미국측의 진주만 양도 요구와 맞물리자 원주민들은 분노하였고, 결국 루날릴로 왕은 그 조약을 철회하였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 술을 많이 마셔, 왕위에 오른 지 1년 25일 만인 그의 39번째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칼라카우아 왕
루날릴로의 뒤를 이은 사람은 이전의 왕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그에게 패한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 재위 1874~1891년)였다.
칼라카우아는 단 한 사람의 적수였던 엠마(Emma) 여왕을 쉽게 물리치고 입법회의에 의해 왕으로 당선되었다. 매우 똑똑하고 매력적이며, 재능있는 사람이었던 그는 폐지되었던 훌라 댄스를 부활시키는 등 사라져 가는 하와이 전통문화를 되살리려고 노력하였다.
또 미국을 방문하여 상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하와이의 설탕을 관세 없이 미국에 수출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상품 또한 관세 없이 수입해야만 하였다. 이를 기회로 미국의 자본가들은 점차 하와이에서 그들의 세력을 넓혀 갔으며, 그 힘은 정치에까지 미쳐 진주만을 미국 해군의 보급기지로 한다는 조항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1881년에 그는 8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했다. 첫목적지는 일본이었으며, 중국을 거쳐 빅토리아 여왕이 있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여기에서 영국 왕실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대관식에 큰 감명을 받은 그는 하와이에서도 대관식을 열겠다고 마음먹었다. 1879년부터 공사에 착수했던 이올라니 궁전(Iolani Palace)은 1882년에 완공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그가 왕위에 오른 9주년을 기념하여 1883년 2월 12일, 스스로 거대한 대관식을 열어 왕관을 썼다. 그러나 이것은 낭비였으며, 너무 사치스러웠다. 이로 인한 많은 정치적인 문제들이 하와이 왕국을 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많은 하와이의 땅이 백인들에게 팔려 넘어갔다.
그는 하와이 왕국의 위신을 높여 세계에 알리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백인들의 세력은 갈수록 커졌다. 유혈혁명으로도 정세를 바로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1887년, 결국 그는 백인들이 강요하는, 왕권을 제한하는 신헌법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 헌법에 따라 각료의 파면권까지 의회가 갖게 되었고, 왕권은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정치분쟁이 심해지자, 그는 요양을 위해 1890년 11월 25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떠났으며, 거기에서 1891년 1월 20일 사망하였다.

-릴리우오칼라니 여왕
칼라카우아 왕이 죽은 후, 그의 여동생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재위 1891~1893년)가 뒤를 이어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칼라카우아 왕이 외유 중일 때는 섭정을 맡기도 했던 여왕은 의지가 강하고 정치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와이를 미국과 합병시키려는 소수 백인들로부터 하와이 원주민들의 권리를 되찾는 데 온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그녀의 반대파들은 합병을 지지하는 연맹을 결성하여 왕권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미국 해군 함대의 선원과 해군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왕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헌법을 공표하려고 했다. 조직적인 군사력을 갖춘 합병파는 여왕이 만든 신헌법 초안에 대하여 일종의 쿠데타라 칭하며, 이올라니 궁전을 봉쇄하고 임시정부를 수립, 여왕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이렇게 하여 하와이 100년 왕국은 비운의 여왕 릴리우오칼라니의 퇴위로 막을 내렸다.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을 노래한 알로하오에(Alohaoe)는 그녀가 작사, 작곡한 것이다.

신하와이, 미국의 50번째 주
-하와이와 미국의 합병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퇴위로부터 1년 반 후인 1894년 7월 4일, 임시정부는 하와이 공화국을 선언하고, 돌(Sanford B. Dole)이 대통령이 되었다.
하와이 합병 문제에 대해 미국 내에서는 논란이 많았으나, 당시 스페인과 미국과의 전쟁으로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요충지가 필요했던 미국 의회는 1898년 7월 7일, 드디어 하와이와 미국의 합병을 승인해, 하와이는 미국땅이 되었다.
미국의 속령이 된 하와이의 도지사로 취임한 사람은 공화국 시대의 대통령이던 돌이었다. 그의 사촌 제임스 돌이 파인애플 통조림 제조와 수출에 성공하면서부터 파인애플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여 설탕과 함께 하와이의 주요 산업이 되었으며, 이로써 하와이는 백인 자본가들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과 하와이 주의 승격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하와이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전쟁이 일어남과 동시에 태평양 지역의 전초기지가 된 하와이는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경제의 기반도 자리잡혀 갔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하와이는 미국 연방에 편입되었다.
1959년, 의회를 통과한 법안에 의해 하와이는 주(州)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해 8월 21일,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의 포고로, 하와이는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하와이 경제의 주역이던 파인애플과 사탕수수 재배는 인건비가 높아져 점차 사양화되고 있으며, 대체 산업으로 관광이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여객기의 발달은 관광산업의 발전에 박차를 가해 1978년부터는 하와이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연방정부의 군사비 지출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주(州)로 승격되어 40년이 가까워오는 오늘날, 인종 차별은 자취를 감추고, 각국에서 온 이민들끼리의 결혼으로 인종적 의식조차 엷어지고 있다.
하와이로의 한국인 이민은 1903년에 시작되어, 현재 약 3만4천여 명의 한국인들이 다양한 지위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1. 호놀룰루가 오하우에 포함되는곳인가여??

호놀루루는 오아후섬에 있습니다.
하와이 섬은 오아후, 마우이, 빅아일랜드, 카우아이그외 모로카이로 나뉩니다.

1번이 오아후 섬입니다.

 

 


2. 혹시 하와이본섬에 오하우가 있나여?
만약에 오하우랑 그 유명한 와이키키비치가 호놀룰루에 있다면;;

맞습니다. 와이키키는 오아후에 있습니다. 와이키키 비치와 호놀룰루가 오아후섬에 있는것입니다.


3. 그럼 하와이본섬엔 무엇이 있는건가여??

본섬을 호놀룰루로 이야기 하는분들도 있고, 빅 아일랜드를 이야기 하는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하우섬을 이야기 합니다.


호놀룰루가 잇는 오하우 섬에는 주정부청사가 있고, 유명한 와이키키해변, 그리고 궁전인 이올라니, 진주만 폭격에 나오는 진주만, 그리고 가장 파도가 높은곳이라서 서핑하기 좋은곳인 선셋해변 ,시계탑, 가장 볼만한 폴리네시안 민속촌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빅아일랜드에는 Volcano  화산 국립공원이 유명합니다.
그외에 호놀룰루 다음으로 큰 힐로 가 있고, 코나 , 유명한 아름다운 아카카폭포, 그리고 아주 독특하게 생긴 산인 마우나 로아라는곳이 있습니다.
그외에 궁전인 훌리헤에, 등 볼곳이 많습니다.


4. 그리고 본섬이라는게 가장큰 섬을 말하는건가여??

아닙니다. 호놀룰루가 있는 오하우 섬을 이야기 합니다.
큰섬은 빅 아일랜드라고 부릅니다.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1945 ~ )

아웅산 수지는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아웅산의 딸로 15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62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 네윈의 사회주의에 대항하면서 수년간 망명생할을 하다가 88년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영국에서 귀국한 후 군사통치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영국에서 돌아온 수지 여사는 미얀마를 일당통치하던 사회주의계획당에 다원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미얀마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야당세력을 망라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창설하고 그 의장이 되었다.

수지 여사가 주도한 민주화 운동은 네윈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들었으나 결국 군사정부에 의한 대량학살의 비극으로 끝났으며 수지여사는 89년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1990년 5월 미얀마의 군사정부는 서방의 압력에 의해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당시 수지 여사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였으나 여사의 인기에 힘입어 총선 결과는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얻어 압승했다. 그러나 군사 정부는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오히려 지도부 등 당원 수백 명이 투옥된 상태다. 그리고 2002년 5월 현재까지 군사정부는 정권 이양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탄압을 가해오고 있다.

1991년 수지 여사는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평화상 수상식이 열렸을 때, 그녀는 미얀마의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여전히 연금상태에 있어 두 아들과 남편이 그녀의 전면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했다.

이후 95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수지 여사는 가택연금에서 6년만에 풀려났지만 99년 남편이 영국에서 암으로 사망할 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 출국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2000년 9월 2차 연금 조치로 양곤 밖으로 여행을 금지당했다.

2000년 9월부터 유엔특사 라잘리 이스마일의 중재 아래 수지여사는 군사정부와 정국 타개를 위한 비밀 협상을 벌여왔다. 그 결과 2002년 5월 미얀마 군사정부를 이끄는 국가평화발전협의회(spdc)는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에서 해제됐다.

하지만 미얀마 군정의 조치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심각한 경제난에 못 이긴 일시적, 상징적인 제스처일 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spdc는 협상에서수지 여사를 석방하는 대신 서방이 가혹한 경제 제재를 해제해 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저보다 로마를 더 사랑하기에

- 브루투스(Brutus

* B.C. 85?∼42. 로마의 정치가. 변론가로서도 명성이 있음

케사르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의 독재에 분개하여 살해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로마 시민 여러분! 잠시 조용히 나의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인격을 믿고 나의 명예를 생각하여 이 브루투스의 말을 의심치 마십시오. 여러분은 분별력 있는 마음으로 냉정하게 내 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시저를 사랑하는 분이 계신다면, 나는 그에게 이 브루투스의 시전에 대한 사랑이 결코 그분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께서는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시저를 죽였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시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로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시저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로마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시저가 죽음으로써 로마 사람들이 자유의 인민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까?

나는 시저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가 용감했기 때문에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가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그를 죽였습니다. 야심에 대해서는 죽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노예가 좋아서 노예가 된 사람이 있습니까? 로마 사람이 아니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있다면 있다고 말씀하십시오. 나는 여러분의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내가 한 일을 책망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내가 시저에게 한 일은 여러분이 이 브루투스를 대신해서 애야 할 일이 아니었습니까?

시저의 죽음 경위는 캐피탈 전당(殿堂) 기록에 올려지고 그의 명예는 추호도 손상됨이 없이, 그의 죄과(罪科) 또한 더 이상 지워지는 일 없이 전해질 것입니다.

오! 시저의 시체 옆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울면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시저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여러분과 함께 시저의 몰락으로 복리를 받는 공화국의 일원이 될 것입니다 

이 브루투스는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습니다. 만약 로마가 브루투스의 죽음을 원할 때에는 브루투스는 언제든지 시저를 죽인 것과 같은 똑같은 칼을 이 몸에 받기를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 이 연설문은 B. C. 44년, ‘브루투스’가 동료 ‘캇시우스’ 등과 함께 시저를 살해한 후 로마 시민 앞에서 행한 연설이다

 출처 :분당 한국스피치교육센터 원문보기

19세기의 독일의 역사가 랑케는 고대 로마를 하나의 호수에 비유했다. 즉 '모든 고대의 역사는 마치 한 호수에 흘러 들어가는 강물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역사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또 모든 근대의 역사는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이말은 서양의 역사에서 로마 문명이 차지하는 위치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서양 문화의 두 조류를 이루는 헬레니즘 전통과 헤브라이즘 전통이 로마 세계의 역사 속에서 처음 합류했던 것이다. 그리스인의 문화가 국제화되어 헬레니즘 문화로 발전했고 로마인은 헬레니즘 문화를 토대로 자신의 실용적인 문화를 가미하여 고대문화를 종합했다. 한편 유태인의 민족종교이던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할 수 있게 된 것도 로마의 역사 속에서였다.

초기 로마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희랍 문화 세계는 쇠퇴와 변질 그리고 차원 다른 문화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문화 세계가 형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 문화의 원류로 볼 수 있는 희랍의 문화 유산을 계승하여 서양의 고전 문화를 완성시킨 것은 로마인들이었다.

로마인들의 활동 무대가 될 이탈리아 반도도 다른 지역과 같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거쳐 금석병용기 시대를 거쳤다. 초기의 인종은 리구리아인(Ligurians)과 이베리아인(Iberians)이었다. 기원전 1700년경과 1200년 경에 로마史의 형성에서 중요한 구

실을 한 이탈리아인(Italicii)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호상 주택에서 살다가 육지 생활을 하였고, 청동기구를 사용했으며 화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들은 테라마레(Terramare)인이라 하며, 그들이 남긴 문화를 테라마레 문화라고 한다.

다음에는 움브리인(Umbrians), 라틴인(Latins), 삼니트인(Samnites)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이탈리아에 철기 문화를 전하였고 선주민들을 추방하거나 융합하면서, 움브리인들은 반도의 북부와 중앙 지대, 라틴인들은 티베르(Tiber)강의 하류 지방, 삼니트인들은 반도의 남부 지방의 산악 지대와 하천가에 정착하였다.

반도의 서부해안지대는 기원전 10-8세기 무렵 이래로 에트루리아인(Etrurians)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들의 원주지는 소 아시아 지방이었으나 기원전 10세기와 8세기 2차에 걸쳐서 이동하여 반도의 서부 해안 투스카니(Tuscany)지방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도시국가를 창설하고 종교적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반도의 남부 해안지대에는 기원전 8세기 이래로 희랍인들이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후일 로마인들은 이곳을 마그나 그레시아(Magna Graecia)라고 불렀다. 아프리카 북부 해안지대와 반도 남방에는 포에니키아인들이 카르타고시를 중심으로 지중해 세계의 해상권을 독점하였고, 반도 북부에는 갈리아인들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일개 도시 국가로 출발하여 세계제국적인 문화를 건설하고 서양의 고전 문화 세계의 완성자가 되었다. 초기 로마인들의 역사적 발전에 관해서는 그들과 에트루리아인들의 관계 때문에 구구한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로마인과 에트루리아인 사이에 종교, 정치, 군사, 사회 그리고 언어상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초기 로마인들의 여러 제도에 에트루리아인들의 제도들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로마 초기의 왕정에 있어서도 로마인과 에트루리아인과의 관계가 밀접하여 대체로 왕들 중의 몇은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보고 있다. 즉 이민족인 에트루리아인들이 한때 로마를 지배하였거나, 에트루리아인들의 한 도시 국가로서 로마가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말 경에 로마인들은 왕정을 추방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로마 민족 내에서의 정치적 혁명이라기보다는 에트루리아 왕권에 대한 로마인들의 민족적이 해방 운동의 결과로 볼 수 있겠다.

로마인들은 수렵 생활에서 목축 생활을 거쳐 농업 경제 생활을 하는 한편, 대외 전쟁을 번번히 수행했기 때문에 로마의 신들은 이들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절대적인 가부장권 하의 가족 제도가 사회의 근저를 이루고 있었다. 사회의 구성요소로는 귀족(patricii)과 평민(plebs) 및 예속민(clientis)등이 있었으나 귀족만이 완전 시민권을 소유하였다. 시민권에는 공권과 사권이 있었는데, 공권에는 참정권과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있었고, 사권에는 통혼권과 소유권이 있었다.

귀족에게는 국가 재정을 부담할 것과 국가 방위의 군사 복무가 의무로 되어 있었다. 이들은 로마의 창설 당시의 3개 부족의 자손들이었다. 전통적으로 혈통의 순수성을 자부하였기 때문에 다른 신분과는 통혼하지 않았다. 한편 평민은 그 구성이 복잡하였고, 권리나 의무도 없이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로마 초기에는 수적으로 적었으나 기원전 6세기 말경에는 그 수가 증가하였고, 공화정 초기에는 귀족의 수를 능가하게 되었다. 귀족은 엄격한 혈연 결혼과 빈번한 대외 전쟁에서 인명과 재정상의 희생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수는 감소되고 있었다.

로마 사회에서 평민들은 정치적 권리와 거주지의 차별 및 혈연상의 차별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불리한 환경에 있으면서도 수적으로 귀족을 능가하였기 때문에 감소일로의 귀족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은 대외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기 때문에 평민의 군사적인 원조가 불가피하였다. 이에 이질적인 계급 사이에 각종의 문제가 야기되고, 마침내 투쟁이 전개되었으나 그 때마다 상호 화합하여 공화정을 더욱 발전시켰다

초기 로마(~BC 6세기)

로마의 탄생과 공화정 초기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으나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전하는데, 그 가운데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 숨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BC 12세기에 트로이 장군 아이네아스가 로마 주변 라티움에 자리잡았고, 500년 뒤에는 라틴족인 로물루스가 로마 시를 세웠다고 한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아이네아스 이야기는 청동기시대 말기에 동방에서 항해자가 찾아온 사실(史實)을 에트루리아족이 아이네아스라는 인물과 접합시켜 만든 듯하고, 로물루스 이야기 또한 BC 8세기 팔라티누스 언덕에 라틴계 유목민이 모여 살게 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뒤 로마는 서서히 도시의 틀을 잡아가다가 BC 7세기에 에트루리아족의 세력 아래로 들어갔고, BC 550년경에는 에트루리아족에게 직접 통치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로마는 빠르게 성장하여 라티움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시로 발돋움했다. 로마인은 종교와 문화에서 에트루리아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그들에게서 알파벳을 배웠다.

로마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씨족(gens)이었는데, 씨족 아래에는 강력한 가부장이 거느리는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혈연관계없이 부조(扶助)와 지원을 받기도 하고 보호자에게 매인 예속자들도 있었다. 왕정시대에 파트리키우스(귀족)와 플레브스(평민)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로마의 종교적 구조는 일찍부터 확립되었으며 왕정시대에는 왕에게 종교적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공화정시대에는 그 권력이 종신 사제 1명에게 넘어가 사실상의 종교적 권위는 제의를 행하는 사제, 점을 치는 아우구르[卜占官], 성스러운 지식을 지키고 알리는 신관(神官)들이 가지고 있었다.

왕정시대에는 왕이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갖고 있었다. 임페리움(imperium)이라고 하는 이 권력은 원래 군대지휘권에서 나왔지만, 종교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로마 왕정은 세습제가 아니었다. 왕은 로마 시민을 세 트리부스(부족)로 나누었는데, 1개의 트리부스에는 10개의 쿠리아가 있었다. 모두 합쳐 30개가 되는 쿠리아는 코미티아 쿠리아타(쿠리아회)를 구성했는데, 이 회의체는 왕을 뽑고 여러 가지 입법권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통치구조는 안정된 동시에 융통성도 갖추고 있어 로마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로마 공화정 초기(BC 6세기~BC 264)

에트루리아 왕조가 BC 509년에 로마에게 무너진 뒤 공화정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공화정의 성립은 일정한 수의 가계가 왕의 군사 지휘권, 왕의 사법적 권한, 왕의 제사적(祭司的) 기능을 이어받은 것을 뜻한다. 원래 왕이 가졌던 권력은 프라이토르 막시무스(praetor maximus)라는 행정관에게 넘어간 듯 하지만 그뒤 2명이 임기가 1년인 콘술(집정관)로서 권력을 갖게 되었다. 원래는 평민도 콘술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으나, 귀족이 곧 콘술직을 독점했으며 4세기 중엽에야 콘술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평민 출신이어야 한다는 법 규정이 나왔다. 국가가 비상사태인 때에는 2명의 콘술 중 1명에게 딕타토르(독재관)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며, 이 딕타토르는 최고 6개월 동안 임페리움(국가의 최고권력자)이 되었는데 실제로 딕타토르가 임명된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처음에는 콘술만이 임페리움을 행사했으나 BC 386년경에 콘술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나 역시 임페리움을 지닌 프라이토르(법무관, 뒤에는 집정관)직이 창설되었다. 프라이토르는 원래 로마 시에서 사법행정을 맡았는데, 뒤에 로마가 팽창해 속주(屬州)들이 생겨남에 따라 점점 그 수가 늘어났다. 또한 켄소르(감찰관)는 5년마다 2명이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인구와 재산을 조사하고, 도덕이 문란해지지 않도록 감찰하는 일을 맡았다. 행정이 차츰 복잡해지자 재정을 담당하는 콰이스토르(재무관)와 공공건물을 관리하고 축제행사를 책임지는 아이딜리스[造營官] 등 더 많은 관리직이 신설되었다

로마인은 아주 일찍부터 법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BC 8세기 무렵 이미 전쟁에 관한 법이 있었다고 하며, BC 5세기 중엽에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成文法)인 이른바 12표법(十二表法)이 제정되어 12개의 청동판에 새겨졌는데, 이것은 모든 법의 원천으로 간주되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이 법은 그때까지 법이 구전되어오던 것을 행정관들이 멋대로 적용한다고 비난해온 평민의 요구에 따라 콘술 대신에 BC 451년과 BC 450년 두 차례에 걸쳐 뽑힌 데켐비리(10인 위원회)가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공화정에서 드높은 권세를 누린 원로원(세나투스)은 왕정시대의 원로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콘술이 소집하고 또한 콘술의 협의에 따르는 기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공화정에서 가장 안정된 최고권력기관이었다. 원로원은 원래 유력한 씨족들의 우두머리로 구성되었으나 곧 모든 전임 행정관들도 원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로원 의원은 처음에는 콘술이, 뒤에는 5년마다 1번씩 켄소르가 임명했다. 임기는 종신이었고 의원들의 서열은 그들이 지냈던 직책의 등급에 따라 정해졌다. 원로원은 민회에서 이미 표결된 법률들을 비준할 뿐이었으나, BC 4세기 후반부터는 민회에 법률을 제안하는 권한까지 가졌다. 또한 원로원은 행정관에게 조언을 했는데, 행정관들은 대체로 그 조언을 따라야만 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법 효력을 갖게 되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속주를 다스릴 행정관을 배치하는 중요한 기능도 맡았다. 원로원에게는 그밖에는 외국으로 보낼 사절을 뽑는 권한도 있었다. 원로원은 종교문제에도 관여해 인습적인 의식과 제식을 유지시켰으며, 국고(國庫)를 도맡아 공공재정을 운영했고, 지출과 과세를 최종 결정했다. 이처럼 원로원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로마 공화정은 사실상 과두정부였다. 대토지를 소유한 원로원 의원들은 유능한 행정가들이었다. 그들의 진정한 어려움은 이민족을 정복한 이후 넓은 제국을 통치해야 하는 책임을 떠맡게 된 데 있었다.

이러한 체제 아래서 플레브스(평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공화정의 첫 2세기 동안 그들은 참정권을 얻어내 파트리키우스(귀족)만의 특권을 하나씩 잠식했다. 싸움은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플레브스들은 정복으로 늘어나는 국유지를 자신들도 점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공화정 초기의 BC 493~492년 전쟁에서 돌아오다가 무장한 채로 성산(聖山)으로 몰려가 플레브스의 권리를 보호해줄 정부관직을 창설하라고 원로원에 요구했다(성산사건). 그결과 만들어진 신성불가침의 트리부누스(호민관)는 행정력의 남용으로 피해를 입는 플레브스를 도울 수 있었으며 콘술이나 원로원·민회의 결정을 거부할 권한도 가졌다. 플레브스 계급의 조직은 코미티아 켄투리아타[兵士會]처럼 재산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거지에 따라 조직된 평민회(Concilium Plebis)가 생겨남으로써 마무리되

It is these well-fed long-haired men that I fear,

but the pale and the hungry-looking.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처럼 잘 먹은 얼굴에 긴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고

창백하고 배고파 보이는 사람들이다.

Julius Caesar(줄리어스 시저)[로마 정치가, 100 B.C.-44 B.C.]

로마帝國 歷代王

【帝政 開幕】

 

▶ 아우구스투스(BC27~14) : 本名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養子

▶ 티베리우스(14~37) : 아우구스투스 妃 리비아 전남편의 아들

▶ 칼리굴라(37~41) :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養子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大아그리피나의 아들

▶ 클라우디우스1세(41~54) :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의 동생

                                        칼리쿨라의 叔父

▶ 네  로(54~68) : 클라우디우스1세의 妃  小아그리피나의 전남편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들

▶ 베스파시아누스(69~79) : 네로시대 軍 總司令官

▶ 티투스(79~81) :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 도미티아누스(81~96) :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5賢帝 時代】- 5

▶ 네르바(96~98) : 콘술(執政官) 출신, 元老院의 추대

▶ 트라야누스(98~117) : 네르바의 養子, 軍人

 

▶ 하드리아누스(117~138) : 트라야누스의 조카, 시리아 知事

 

▶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 하드리아누스의 養子, 콘술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養子

 

【세베루스 王朝와 軍人 皇帝 時代】- 31

 

▶ 코모두스(180~192)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殺害

 

▶ 페르트낙스(193) : 解放 奴隸의 아들, 콘술, 近衛隊에 暗殺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193) : 富戶, 세베루스 部下에게 殺害

 

〔세베루스 王朝〕- 6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 알제리駐屯軍司令官, 病死

 

▶ 카라칼라(198~217)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

 

                                가장 殘忍한 暴君중 하나, 部下에게 暗殺

 

▶ 게타(209~212) : 카라칼라의 동생, 형에게 殺害

 

▶ 마크리누스 (217~218) : 近衛隊長, 戰鬪에 패배 處刑

 

▶ 엘라가발루스(218~222) : 카라칼라의 5촌 조카, 近衛兵에 暗殺

 

▶ 세베루스 알렉산더(222~235) : 엘라가발루스의 4촌, 殺害

 

 〔軍人 皇帝〕- 22

 

▶ 막시미누스(235~238) : 士兵 출신, 元老院에 의해 폐위, 被殺

 

▶ 고르디아누스1세(238) : 아프리카 프로콘술, 自殺

 

▶ 고르디아누스2세(238) : 고르디아누스1세의 아들, 戰死

 

▶ 푸피에누스 막시무스(238) : 발비누스와 共同皇帝, 콘술, 殺害

 

▶ 발비누스(238) : 막시무스와 共同皇帝, 近衛隊에 殺害

 

▶ 고르디아누스3세(238~244) : 고르디아누스2세의 조카, 殺害

 

▶ 필리푸스(244~249) : 아랍인, 近衛隊長, 데키우스에게 殺害

 

▶ 데키우스(249~251) : 콘술, 고트족과의 싸움에서 戰死

 

▶ 호스틸리아누스(251) : 데키우스의 둘째아들, 傳染病으로 死亡

 

▶ 갈루스(251~253) : 호스틸리아누스와 共同皇帝, 部下에 殺害

 

▶ 아이밀리아누스(253) : 콘술, 反亂으로 집권, 部下에 殺害

 

▶ 발레리아누스(253~260) : 콘술, 아이밀리아누스 타도, 捕虜 死亡

 

▶ 갈리에누스(253~268) :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叛亂軍에 殺害

 

▶ 클라우디우스2세(268~269) : 騎兵隊長, 고트족의 征服者

 

▶ 퀸틸루스(269~270) : 클라우디우스2세의 동생, 殺害

 

▶ 아우렐리아누스(269/270~275) : 클라우디우스의 친구, 殺害

 

▶ 타키투스(275~276) :

 

▶ 플로리아누스(276) : 타키투스의 異父 동생, 殺害

 

▶ 프로부스(276~282) : 시리아軍團의 將軍, 殺害

 

▶ 카루스(282~283) : 프로부스의 近衛隊長, 疑問의 죽음

 

▶ 누메리아누스(283~284) : 카루스의 큰아들, 東部皇帝, 病死

 

▶ 카리누스(283~285) : 카루스의 작은 아들, 西部皇帝, 殺害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帝國 再建】-15

 

▶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 賤民出身, 近衛隊長, 四帝統治

 

▶ 막시미아누스(286~305, 306~308) : 디오클레티아누스의 戰友

 

                                        콘스탄티누스의 丈人, 內紛으로 自殺

 

▶ 갈레리우스(305~311) : 東部 카이사르, 콘스탄티우스와 共同皇帝

 

▶ 콘스탄티우스1세(305~306) : 카이사르, 막시미아누스의 養子

 

▶ 세베루스(306~307) : 카이사르, 막시미아누스에게 處刑

 

▶ 막센티우스(306~312) :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시미누스와 聯合

 

                                   콘스탄티누스와의 싸움에서 戰死

 

▶ 리키니우스(308~324) : 갈레리우스의 친구, 콘스탄티우스와 聯合

 

                                    콘스탄티누스에게 處刑

 

▶ 막시미누스(310~313) : 카이사르, 리키니우스와의 싸움에서 戰死

 

▶ 콘스탄티누스1세(312~337) :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리키니우스와

 

                                           聯合, 막시미아누스의 사위

 

▶ 콘스탄티누스2세(337~340) : 콘스탄티누스의 둘째 아들

 

                                           콘스탄스와의 싸움에서 戰死

 

▶ 콘스탄스1세(337~350) : 콘스탄티누스의 넷째 아들

 

                                      마그텐티우스에게 殺害

 

▶ 콘스탄티우스2세(337~361) : 콘스탄티누스의 셋째 아들

 

                                           마그텐티우스 擊破, 病死

 

▶ 마그텐티우스(350~351) : 게르만出身 軍人, 콘스탄스 殺害

 

                                      콘스탄티우스에게 패해 自殺

 

▶ 율리아누스(361~363) : 콘스탄티누스의 조카, 페르시아 戰鬪에서 戰死

 

▶ 요비아누스(363~364) : 軍人, 病死

 

【게르만 移動과 로마帝國 滅亡】- 15

 

▶ 발렌티니아누스1세(364~375) : 율리아누스의 軍事護民官

 

▶ 그라티아누스(375~383) : 발렌티니아누스1세의 아들

 

                                      막시무스에게 殺害

 

▶ 발렌티니아누스2세(375~392) : 발렌티니아누스1세의 아들

 

                                             아르보가스트에게 殺害

 

▶ 호노리우스(393~423) : 테오도시우스의 둘째아들

 

▶ 콘스탄티우스3세(421) : 호노리우스의 軍司令官, 急死

 

▶ 발렌티니아누스3세(425~455) :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殺害

 

▶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455) : 콘술, 群衆에게 殺害

 

▶ 아비투스(455~456) : 軍司令官, 서고트왕에 의한 傀儡皇帝

 

▶ 마요리아누스(457~461) : 軍人出身, 리키메르에 의해 옹립, 處刑

 

▶ 리비우스 세베레스(461~467) : 리키메르에 의한 傀儡皇帝

 

▶ 안테미우스(467~472) : 마르키아누스의 사위, 리키메르에게 斬首

 

▶ 올리브리우스(472~473) : 발렌티니아누스의 사위, 元老院 議員

 

▶ 글리케리우스(473~474) : 리키메르의 조카 군도발트에 의해 옹립, 廢位

 

▶ 율리우스 네포스(474~475) : 글리케리우스 지지자들에게 殺害

 

▶ 로물루스 아우구스 툴루스(475~476) : 오레스테스의 아들

질문자 한마디 우와, 정말 최고의 답변입니다.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 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화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 문화권이던 에트루리아인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 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 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 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 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 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 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 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의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로마의 정치제도와 로마법은 오늘날의 유럽의 정치체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 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 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많은 용어들이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이다.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 영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 등, 그리고 우리나라 등 여러 근대 국가의 법률적 기저가 되었다. 로마법의 발달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불문법의 단계인데, 이는 종교적 관습과 혼합된 매우 엄격한 神法의 시대를 말한다. 그 다음이 12표법이다.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것은 12표법이라 할 정도로 이것은 중요하다. 이는 신법이 시민법으로 바뀌는 법의 세속화 현상과 법과 관습의 성문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 제도,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의 민법과 약간의 공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따라 로마의 법률 기관이 확장되고 법무관(Praetor)직 창설된다. 시민법은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 후 로마는 영토를 확대해가면서 이민족의 관습을 법체계 속에 섭렵하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발생하게 된 것이 만민법이다. 만민법은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지역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 노예 제도와 계약, 상거래 등을 내용으로 하고있다. 이 법은 시민법보다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 내 이민족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을 보충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알렉산더 세베루스 치세하에 활약한 울피아누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하게 된다. 마침내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 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이 발달한다. 자연법은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 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유래한다. 자연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물이며 스토아 철학에 그 근원을 둔다.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황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한다. 이 법은 국가보다 우위에 있어서,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어쨋든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탁월한 업적에 속한다. 자연법은 실정법보다 우월한 만고불변의 자연권에 연결된 고정법이다. 현실적으로는 원로원 등 전통 기득권층의 특권을 초월하여 황제의 명령권, 입법권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같은 과정으로 발달한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한다. 로마법은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에 이르러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 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으로 집대성된다. 로마 문화의 특색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분야는 건축이다. 로마의 건축은 국가 생활의 표현으로서 확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마는 정복자로서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수많은 조각, 구조물, 대리석 기둥 등을 약탈하여 그들의 호화스러운 저택을 장식하였다. 원수정 초기에 제국을 에워싸고 있던 국가적

 

영광의 분위기 속에서, 건축 분야는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라틴적인 특징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권력과 영광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구조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로마인들이 대규모의 토목 건축, 예컨대 도로, 교량, 댐, 저수지, 항만, 상하수도 시설 등을 축조하게 된 동기는 광범한 제국의 통치상 필요한 실용성이다. 건축 양식은 그리스, 에트루리아 혹은 메소포타미아 등의 양식들을 모방하였으나, 그 구조가 견고하며 착상의 규모가 크며 장식적인 특색이 있다.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로부터 배운 원형 아아취를, 기둥에는 그리스의 세양식을 사용하고, 로마인 독자적인 것으로는 도옴, 특히 궁륭(穹?)을 독특한 교차형으로 발전시켰다. 건축의 주재료는 석재, 콘크리트, 벽돌, 대리석 등이었다. 로마인이 처음 시작한 콘크리트법(이탈리아 지질이 화산질 지형으로 주위에 흔한 화산재와 석회석을 혼합)은 건축물을 매우 견고하게 하는 공법이었으며, 근세에 부활되었다. 로마인이 만든 교량이나 도로는 전대의 어떠한 민족도 능가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스페인의 세고비아의 水道라든지 로마의 아피아路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사용되고 있다. 그외 신전, 포룸, 극장, 투기장, 경마장, 욕탕, 기념 건조물, 바실리카 와 같은 대규모 공공 건물이 있다. 로마의 대표적인 신전은 돔 양식의 판테온 신전(아그리파 건축, 하드리아누스 개축)인데, 직경 43.2미터의 거대한 원형 신전으로 북쪽 입구 부분에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붙박은 돌출부를 갖추었다. 내부는 천장에 있는 직경 9미터의 天窓에서 원형의 공간에 쏟아지는 ㅂ이 대리석 바닥의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있으며, 주위에는 일곱 개의 커다란 벽감(壁龕)이 있어, 마르스,

 

비너스 등의 신상이 세워져 있다. 그 외 목욕탕과 경기장(앞 장 참고) 등이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로마인들의 의복생활을 살펴보도록 하자. 로마의 복식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양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로마의 시대 상황에 맞게 변화되었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복식의 재료와 형태도 다양해졌다. 로마인들이 의복을 입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 였는데,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급을 나타내고,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로마인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 부, 나이 등을 자신들의 의복으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토가는 시민의 유니폼같은 것이었는데, 점차 의례용의 관복이 되면서 색과 장식선, 입는 방법등이 엄격해졌다. 대개 표백하지 않는 양모(후일 실크가 수입되면서 실크도 사용)로 된 키의 세배(약 8.3제곱미터 가량)나 되는 타원형의 긴 천으로 어깨에서 발 끝까지 감싸게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의 회합에는 보통 베이지나 갈색의 토가의 물결을 이루었는데, 다만 입후보한 사람들만이 눈에 두드러지게 새하얀 토가를 입었으므로, 흰 색깔을 의미하는 'candidus'라는 라틴어에서 후보자 'candid'라는 말이 나타났다.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들은 진홍색 혹은 자주색의 띠로 장식하여, 서열에 따라 휘장을 달리하여 신분을 구별하였다. 지붕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는 토가는 공공 생활에서 덮어주고 감싸주고 점잔을 떠는 옷이었으나, 그리 편리하지는 못하였다. 여름에는 무겁고 겨울에는 추웠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왼손으로는 토가의 왼쪽 자락 끝을 잡고 있어야 하였으므로 오른 손만이 자유로왔던 것이다. 이는 즉 평화시의 옷이라는 의미로서 전쟁시의 병사들의 옷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인들처럼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았는데, 토가를 입었을 경우 머리와 손만 노출되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인들은 '머리와 토가와 오른 손'의 세가지로 대표되어 졌다. 그외 토가 아래 입는 튜니카 등이 대표적인 의상이었는데, 남녀 어느 계급에서나 보편적으로 착용되었다. 튜니카는 길이가 무릎에 미치는 셔어츠로서, 초기에는 넉넉한 실루엣에 소매없이 허리띠를 맨 형태에서, 후기에는 간단한 T자형의 원피스 형태가 되고, 신분에 따라 지위나 계급을 상징하기 위해 끌라비라는 수직선 장식을 하였다. 일을 할 때나 걸어다닐 때는 남자는 튜니카만을 입으면 되었는데, 잠옷으로도 사용되었다. 떼베나는 프릴이 달린 소형의 숄로 튜니카위에 걸쳐 입는 상류 계급의 복식이었다. 형태는 만원형, 장방형, 원형 등이 있었다. 그 외 팔루다멘툼은 귀족 계급이 착용하는 일종의 망토형의 군복으로 제정시대 중기 부텨 착용되었으며, 울이나 실크가 주로 쓰여졌다. 여자들은 스톨라라는 긴 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를 튜니카 위에 입고 허리께를 벨트로 묶었다. 귀부인들은 파라솔과 부채를 아울러 갖고 다녔다.

그리스의 문화를 종교, 철학, 예술.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고대 그리스에서 믿었던 종교는, 인간이 맨 먼저 동굴 속에 모여 살면서 믿었던 것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신을 사람과 똑같은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신은 죽지 않고,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기는 하나 역시 인간과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 신화를 읽어보면, 신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투고 사랑과 미움의 감정에 싸여 고민을 하고, 또한 잔혹한 면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신들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은 신들을 위해 거창하게 제사를 지내 주거나 또는 올림피아 제전과 같은 각종 경기 대회를 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현대와 같이 전지전능한 그런 신이 아니고, 제우스를 중심으로 각각 다른 직분과 권능을 가진 여러 신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우스는 최대의 권력을 지닌 신 중의 왕이었고,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 아테나는 전쟁과 지혜의 여신…. 이렇게 많은 신들이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고 그리스인들은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모두 크고 작은 사회적·윤리적 문제에 대해 신들의 뜻을 묻는 '신탁'이 행해졌고, 그 내려진 신탁에 따라 결정하였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은 소아시아 지방의 이오니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도시들은 차차 상공업이 성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밀레토스라는 도시가 특히 발달하였습니다. 밀레토스는 학문과 예술도 크게 번성했습니다. 이오니아 학파, 또는 밀레토스 학파라고 불리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그리고 아낙시메네스들의 철학자가 이곡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서양 최초로 우주의 문제를 이성에 의해 생각해 보려고 했던 철학자들이었습니다.

탈레스는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또 일식을 예언한 유명한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처음으로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만물의 기원을 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그리고 '물질의 근본을 공기이다.'라고 한 아낙시메도스 등의 밀레토스 학파를 시작으로 하여 그리스 전 지역에서 유행했던 철학을 우리는 '자연철학'이라고 부릅니다.

자연철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이 갖고 있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자연 현상을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생각을 거기에서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자연철학자들이 자연 현상을 연구한 것과는 달리, 기원전 5세기부터는 '인간'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철학이 생겨났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 소피스트들이 나타난 시기는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에 승리하여 번영했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기하학과 수사학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실제적인 지식을 강조했습니다. 그 까닭은 이 무렵의 사회가 지식과 말재주를 요구하였기 빼문입니다.

끝으로 그리스 문학의 대표는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입니다. 이 작품들은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장편 서사시로서 <일리아드>는 아킬레스의 분노와 트로이의 멸망을 그렸고, <오딧세이>는 오딧세이의 지혜와 상상력에 음악성을 넣어 박진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그 밖에 서정시인인 사포와 아나크레온, 판타로스 등이 사랑과 증오를 주제로 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희곡 또한 그리스에서 발달한 문학 중의 하나입니다.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는 날카롭게 사회릐 비리를 풍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리스 예술 중에서 조각과 건축은 가장 주목을 끕니다. 조각은 신과 인간을 주요 소재로 삼았는데, 그 사실적인 묘사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룹니다. 건축 또한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룹니다. 라오콘의 군상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과 정교함을,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소박하면서도 우아함을 자랑합니다.

그리스인들이 인류에게 남겨 준 또 하나의 업적은 바로 역사학입니다. 위대한 역사가인 헤로도투스는 기원전 438년에 아테네로 왔습니다. 소아시아 출신인 그는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 각지를 돌아다녀 보고 역사책 9권을 썼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페르시아 전쟁사>입니다. 헤로도투스는 오늘날 '역사의 아버지'라고까지 일컬어 집니다.